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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길영상관

옛길영상관
2층 전시관에서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본 영상관에서는 사람과 길에 대한 이야기를 멋들어진 애니메이션과, 아름다운 영상으로 나누어 보여줍니다. 전체 상영시간은 8분 내외이며, 1회 총 수용인원은 배치된 좌석 기준으로 40명입니다.
동영상 자료모음

문경새재 제1관문
- 길이야기(애니메이션)
- 성우 배한성씨의 구성진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 본 애니메이션에서는 우리 인간이 살아왔던 시간을 따라 남겨진 긴 흔적, 길에 대한 이야기가 먹 향기 물씬 풍기는 전통 수묵화 기법으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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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우 배한성씨의 구성진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 본 애니메이션에서는 우리 인간이 살아왔던 시간을 따라 남겨진 긴 흔적, 길에 대한 이야기가 먹 향기 물씬 풍기는 전통 수묵화 기법으로 펼쳐진다.

길, 그 아름다운 소통
- 길, 그 아름다운 소통
- 인류의 역사가 새겨진 산물이자 우리의 이상을 향한 통로로서,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새로 생겨나는 길의 아름다운 모습을 통해 오늘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들에게 길이 주는 진정한 소통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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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의 역사가 새겨진 산물이자 우리의 이상을 향한 통로로서,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새로 생겨나는 길의 아름다운 모습을 통해 오늘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들에게 길이 주는 진정한 소통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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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장소 | 제목 | 종류 | 음향 | 미리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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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전시관 |
#04 문경의 출토복식 | 전주최씨 유물발굴현장 들여다보기 | 비디오 | ||
평산신씨 유물발굴현장 들여다보기 | |||||
#06 땅,산,물,길 | 지 | 비디오 | ○ | 동영상 다운로드 | |
산 | 있음 | ||||
수 | 있음 | ||||
로 | 있음 | ||||
#08 대동여지도 들여다보기 | 미정 | ||||
#07 우리나라 옛지도 | 시대별 지도 보기 | ||||
2층 전시관 |
#01 옛길영상관 | 길 이야기 | 애니메이션 | 있음 | 동영상 다운로드 |
길, 그 아름다운 소통 | 비디오 | 있음 | 동영상 다운로드 | ||
#04 한국의 고개 | 문경새재 | 비디오 키오스크 |
동영상 다운로드 | ||
하늘재 | 동영상 다운로드 | ||||
황토령, 부전령, 철령, 미시령, 대관령 죽령, 이화령, 육십령, 여원재 |
|||||
#06 영남대로 천리길 | 동래에서 문경까지 | 비디오 | |||
문경새재, 길은 고개를 넘어 이어진다 | 동영상 다운로드 | ||||
문경에서 한양까지 | |||||
#08 한국의 역과 원 | 조선의 역참 | 3D 시뮬레이션 | |||
#13 백두대간을 바라보다 | 백두대간 | 비디오 | 있음 | 동영상 다운로드 |
위성으로 보는 문경

위성으로 보는 문경
가로 5m, 세로 4m의 정교한 위성 사진을 통해 영남대로 옛길, 신작로, 2차선국도, 4차선국도, 철로, 고속도로가 모두 지나고 있는 문경의 지리학적 특징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우리나라 [길박물관]으로서 문경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본 전시실은 문경의 옛 지도들과 현재의 위성사진을 나란히 비교해 볼 수 있어 오늘날 문경이 지니고 있는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읽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문경의 미래 모습까지 투영해 볼 수 있는 특별한 전시 공간입니다.
풍광이 수려한 문경의 자연경관을 문경새재 역사유적 및 관광명소와 관련된 이야기로 함께 엮어 모두 여덟 개 부문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Part 1. 진남교반 크게 보기


고모산성 성벽에 올라서면 절벽을 휘돌아가는 영강 물줄기의 진남교반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진남교반은 경북팔경 중의 제1경으로 손꼽히는 곳으로 주위 풍광이 수려하고 문화유적이 많다. 교반이라는 말은 다리 주변을 뜻하며 진남 교반은 진남교 다리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말한다.
영남대로 옛길, 신작로, 2차선국도, 4차선국도, 철로, 고속도로가 모두 이곳을 지나고 있어길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Part 2. 토끼비리를 노래하다
꼬불꼬불 양창자 같은 길이여
꾸불꾸불 오솔길 기이하기도 하여라
봉우리마다 그 경치도 빼어나서
내 가는 길을 막아 더디게 하네.
屈曲羊腸路 (굴곡양장로)
遷시鳥道奇 (천시조도기)
峰巒一一勝 (봉만일일승)
遮莫馬行遲 (차막마행지)
사가 서거정 (徐居正 : 1420~1488) 팔영시 中
예전엔 얼음과 눈 냇가에 가득하여
여윈 말 벌벌 떨며 걸음마다 넘어졌지
오늘은 가는 길 역관에 편히 들러서
그곳에 잠깐 머물러 향긋한 외를 먹었네
往時氷雪塞長川 (왕시빙설새장천)
瘦馬凌競步步顚 (수마능경보보전)
此日郵停安穩過 (차일우정안온과)
少留還爲膾芳鮮 (소유환위회방선)
용재(容齋) 이행 (李荇 : 1478~1534)
Part 3. 돌고개 성황당과 꿀떡고개
- 돌고개 성황당 전설
진남교반 돌고개 마을의 성황당은 영남대로가 지나는 곳이다. 옛날 과거길에 오른 어느 선비가 이곳의 조그마한 초가집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그집에는 아버지와 딸이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이 선비의 인품이 범상치 않음을 알고 자기 딸을 맡아 달라고 간청하여 승낙을 받았다. 선비는 며칠을 머물다가 과거길을 재촉하고 급제한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였다. 처녀는 매일 치성을 올리며 기다렸고, 선비는 급제하였으나 약속을 잊어버리고 수년이 흐르게 되었다. 아버지마저 죽고 선비는 돌아오지 않자, 고생을 참다못한 처녀는 선비를 원망하며 자결한 후 큰 구렁이로 변하였다.
그 후 이곳을 지나는 행인들이 구렁이에게 자주 피해를 입는다는 말이 온 사방에 퍼졌다. 선비는 그때야 이 구렁이가 그 처녀의 원귀임을 알았고, 그원혼을 위로코자 제사를 올렸다. 천둥번개와 함께 구렁이가 나타나 눈물을 흘리며 사라진 뒤론 이런 일이 없어졌다. 마을사람들은 이 처녀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이곳에 성황당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 꿀떡고개 전설 진남교반에는 돌고개가 있다. 이 고개의 또 다른 이름이 꿀떡고개 이다. 꿀떡을 파는 떡점이 있어서 꿀떡고개이기도 하고, 숨이 차올라 '꼴딱고개'이기도 하다,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은 이 꿀떡고개에서 반드시 꿀떡을 먹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꿀떡을 먹어야 과거에 급제한다는 말을 이미 들었기 때문이다. 꿀떡을 한 입 베어 문 선비는 힘찬 발걸음으로 한양으로 향했고 결국 장원급제하여 금의환향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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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개 성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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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속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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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떡고개
Part 4. 문경새재 크게 보기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조령산 마루를 넘는 이 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鳥嶺)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옛 문헌에 초점이라고도 하여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재와 이우리재(伊火峴)사이의 「새(사이)재」, 새로 된 고개의 「새재」 등의 뜻이라고도 한다. 새재의 유래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이 주변의 역사와 문화를 읽어낼 수 있다.
Part 5. 문경새재 관문과 관방시설

주흘관(主屹關)-영남제1관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계곡에 있는 관문으로서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숙종 34년(1708)에 설관 하였으며 영남 제1관 또는 주흘관이라고 한다. 관문 양쪽에 개울물을 흘러 보내는 수구문이 있으며 3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잘 지니고 있다.

조곡관(鳥谷關) - 영남제2관
경상북도 문경 새재의 제이 관문으로서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27년1594에 신충원이 축성한 곳으로 중성(中城),조동문(鳥東門),주서문(主西門)이라고 한다. 임진왜란의 안타까운 역사 때문에 이곳에 관방을 설치하였다.

조령관(鳥嶺關) - 영남제3관
문경 새재의 세 번째 관문으로서 문경새재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숙종 34년1708에 1관문과 함께 쌓았다. 이후 비로소 조령산성이 명칭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Part 6. 문경새재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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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 성황당과 산신각
새재 성황당은 여신이 모셔져 있으며 병자호란 때의 최명길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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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관찰사의 교인처-교귀정
경상도의 첫 땅인 문경새재에서 경상도 관찰사의 교인식이 이루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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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길원 현감 충렬비
경북유형문화재 제145호.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맞아 순국한 신길원 현감의 충렬을 기리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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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길원 현감 충렬사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맞아 순국한 신길원 현감의 충렬을 기리기 위하여 가을에 행사를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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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국사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한 곳, 이때에 나라의 은혜를 입은 절이라 하여 혜국사라 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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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됴심비
문화재자료 제 226호. 조선시대 순수한글 비석으로산불조심의 시금석 '됴심'은 '조심'의 옛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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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추
옛날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으며 겸재정선의 그림과 퇴계 이황 등의 글이 전하는 곳
Part 7. 문경새재를 노래하다

객주
문경새재는 김주영의 소설 『객주』의 첫머리를 열었던 곳이기도 하다. 문경새재를 시작으로 서울은 물론 남으로 경주, 하동, 군산, 강경, 북으로 평양, 원산에 이르기까지 모세혈관처럼 뻗어 있는 이 땅의 크고 작은 길들을 따라 질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작가는 소설의 도입부를 쓰기 위해 배경이 된 문경새재를 다섯 번이나 답사했다고 한다.

의적 일지매
나라에 반역하여 재물을 모은 자들을 직접 응징하는 일지매 이야기는 임진왜란 뒤에 백성들의 입을 통해 널리 전해졌다. 소설가 정비석은 1974년, 『의적일지매』에서 문경을 주무대로 하여 활약하는 일지매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정의로운 한 소년이 약한 자를 돕는 의적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문경새재를 배경으로 하여 흥미진진하게 그려지고 있다.

새재
신경림의 장시 『새재』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새재 길을 넘던 민중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민중들에게 고갯길은 피와 눈물로 넘는 비탈이기도 했으나, 그 고갯마루에 올라서기만 하면 기어이 열리고야 말 것 같은 새 세상에 대한 꿈이기도 했다.
Part 8. 우리나라 최고의 고개 하늘재
하늘재는 서기 156년, 신라 아달라이사금 3년에 개통된 고개다. 지금으로부터 18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영주와 단양을 잇는 죽령은 그로부터 2년후에 개척되었다.이렇게 장구한 세월을 이어온 고개이다보니 시대와 국가에 따라서 그 이름도 다양하다. 계립령, 계립현, 마목현, 마골산, 마골참, 대원령, 한훤령, 겨릅재, 지릅재 등의 별칭을 갖고 있다. 지금은 모두 순우리말 '하늘재'로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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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립현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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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재 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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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리 석불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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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평리 5층 석탑
당시 신라는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군사도로로서 하늘재를 개통하였지만, 교통로로서 크게 활용하지는 못하였다. 그 후 하늘재는 신라와 고구려 어느 나라도 장악하지 못한 국경을 상징하는 고개로 남아 있었다. 6세기 중반 한강유역에 진출한 신라는 중국으로 통하는 해상 교통로의 확보와 대내외 육상 교역로로서 많은 활용을 하게된다.
서기 590년 경, 우리 역사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의 주인공 고구려의 온달장군은 "계립령과 죽령의 서쪽이 우리에게로 돌아오지 않으면 나도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외에도 하늘재는 불교문화의 전파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 조선초기 문경새재에 그 역할을 넘겨주면서 관도로서의 기능은 잃었지만, 부보상과 같은 장사꾼의 이동과 문경 도자기의 생산과 유통 등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토끼비리

토끼비리
Part 1. 관갑천잔도
"고려태조 왕건이 견훤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남하하다가 이곳에 이르렀는데 길이 막혔다. 마침 토끼 한 마리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길래 이를 쫓아가다 보니 길을 낼 만한 곳을 발견하여 벼랑을 잘라 길을 냈다." 토끼비리, 즉 토천(兎遷)이라는 이름이 얻어진 유래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비리’라는 말은 ‘벼루’의 문경방언으로서 낭떠러지 아래 강이 흐르거나 해안을 끼고 있는 곳을 가리키며 벼랑과는 구별됩니다.
절벽과도 같은 산허리를 따라 굽이굽이 6~7리나 이어진 토끼비리는 관갑천잔도, 곶갑천잔도, 토잔 등으로도 불리는데, 잔도(棧道)는 나무 사다리 길을 말하며, 천도(遷道)는 하천변의 절벽을 파내고 만든 벼랑길을 뜻합니다.
본 전시실에서는 조선시대 간선도로인 한양∼동래간 영남대로상의 가장 험준한 구간으로 오늘날까지도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있는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 31호, 토끼비리의 원형을 축소하여 재현해 놓았습니다. 천도와 잔도의 생김새와 쓰임새를 직접 눈으로 살펴봄으로써 이땅의 옛길 위에서 살다 간 조상들의 지혜를 느껴보세요.
한국의 고개

한국의 고개
고개는 산이나 언덕을 넘어다니도록 길이 나 있는 곳을 말합니다. 또한 일의 중요한 고비나 절정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고개는 우리 역사의 고비 때마다 희망과 좌절이 교차한 곳이기도 합니다.
청운의 꿈을 안고 넘나들던 선비에서부터 삶의 역경을 참아가며 눈물로 드나들던 민초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과 문물이 스쳐가면서 남겨놓았던 사연들이 길 위의 역사와 고개의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본 전시실에서는 조선팔도 고갯길의 대명사 문경새재를 중심으로 백두대간을 따라 위치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주요 열 두 고개에 대한 이야기를 각각의 동영상을 선택해서 직접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고갯길 여정 안내
- 한국의 고개 (황토령, 부전령, 철령, 미시령, 대관령, 죽령, 문경새재, 추풍령, 육십령, 여원재)
- 영남의 고개 (죽령, 문경새재, 추풍령)
- 문경의 고개 (하늘재, 문경새재, 이화령)
희망을 품고 떠나는 길

희망을 품고 떠나는 길
Part 1. 조선의 과거제도

소과응시
Part 2. 문경새재와 과거길
사람마다 시험에 대한 징크스는 오늘날에도 다양하고 흥미롭다. 전통사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은 문경새재와 추풍령, 죽령이 대표적인 고개였다.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은 유독 문경새재를 고집했다.
문경(聞慶)이라는 지명이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의 뜻이고, 옛 이름이었던 문희(聞喜) 역시 '기쁜소식을 듣는다'라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죽령과 추풍령을 넘기 싫어한 이유는 죽령을 넘으면 과거시험에 '죽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득이 추풍령 앞에 이르게 되면 옆쪽의 '괘방령(掛榜嶺)'을 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경새재는 조선팔도 고갯길의 대명사로서 영남대로가 지나는 곳이며, 당시 사람과 물류가 가장 많이 이동하는 나라 안의 가장 큰길이었다. 또한 관방시설로 인하여 군사들이 지키는 곳이어서 과거길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였다. 동래에서 한양까지 과거길에 오른다고 가정할 때 문경새재는 가장 짧은 길이기도 했다. 문경새재 길은 열나흘, 죽령길은 보름, 추풍령 길은 열엿새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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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흘관에서 바라 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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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곡관 앞의 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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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령관에서 바라 본 소조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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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령관의 박석포장길
Part 3. 장원급제길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게는 다채로운 의식과 축하행사가 펼쳐졌다. 급제의 여부는 방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국왕은 문무과의 급제자에게 종이로 만든 꽃인 어사화(御賜花)와 왕을 만날 때 손에 쥐는 홀, 술과 과일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급제자들에게 은영연(恩榮宴)이라는 축하연을 베풀어 주었다. 다음 날에는 급제자들이 모두 문과 장원의 집에 모인 후 대궐에 들어가 국왕에게 사은례(謝恩禮)를 올렸다. 그 다음날에는 무과 장원의 집에 모여 공자를 모신 문묘에 가서 알성례를 올렸다. 그 후 삼일유가라 하여 친지를 불러 잔치를 하거나 선배의 집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거나 시관(試官)을 초대하여 은문연(恩門宴)을 열기도 하였다.
고향으로 내려오는 영광의 귀향길에는 연희자들이 초청되어 고향에 이를 때까지 삼현육각을 연주하고 각종 연회를 펼치기도 하였다. 고향에 도착하면 그곳 수령과 향리들의 환영을 받았다. 향교에서 알성례를 올리고 나면, 수령이 급제자와 그 부모를 불러 주연을 베풀었다. 말 그대로 영광스러운 장원급제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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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영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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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유가
Part 4. 낙방길
급제자의 금의환향 길과 달리 낙방자들은 절망과 좌절 속에 귀향길에 올랐으며, 그 과정에서 느낀 쓰라린 심정을 글로 남기기도 하였다.

풍속도
- 박득녕(1808~1886) 『조성일월』
"지난해 새재에서 비를 만나 묵었더니 올해는 새재에서 비를 만나 지나갔네. 해마다 여름비, 해마다 과객 신세. 필경엔 허망한 명성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 유우잠(1575~1635)
그러나 모든 낙방자들이 허탈한 마음으로 곧바로 귀향길에 올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한양 명승지를 유람하며 마음을 위로하는 경우도 있었다. 과거에 낙방한 자들은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양의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기도 했는데, 송파진은 가장 대표적인 장소였다. 송파나루는 서울과 광주를 잇는 중요한 나루였다.
Part 5. 여행자들의 숙식 해결법
몇 날 며칠을 걸어서 이동하는 여행객들에게 숙식의 해결은 큰 문제였다. 관리들을 위한 관, 역, 원 등의 숙박시설이 있었고, 일반인들을 위한 점, 주막, 객주 등이 있었다. 문경의 영남대로상에는 관산지관과 같은 객사와 유곡역, 요성역, 조령원, 견탄원과 같은 역원시설이 있었다. 주막은 초곡주막과 돌고개주막, 달지주막이 대표적인데 대개 고객와 나루 주변에 위치하고 있었다.
주막은 원이 쇠퇴하면서 번창한 곳으로, 개인이 영리를 목적으로 운영했던 일반여관이라고 할 수 있다. 17~18세기에는 교통의 요지마다 주막촌과 시장이 입지하게 되었으며, 19세기 후반에는 마을과 마을 10~20리 사이에는 1개소 이상의 주막이 있었다.
주막에서는 술이나 밥을 먹으면 보통 음식값 외에는 숙박료를 따로 받지 않았고, 손님에게 침구를 따로 제공하는 일도 드물었다. 먼저 들어온 사람이 아랫목을 차지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는데, 좁은 봉놋방에 10여명이 혼숙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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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지관
조선시대 문경현의 객사, 관리들이 묵던 곳으며 왕명을 전달받고 초하루와 보름에 달을 보면서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리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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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지관
조선시대 길손들이 머물렀던 문경새재 주막 또는 영남에서 한양가는 선비,상인들이 지친몸을 쉬어가던 곳
영남대로

조선의 대동맥 영남대로
조선왕조 개국과 동시에 조정은 한양-동래간 간선도로의 노선을 확정하였는데, 이것이 영남대로 입니다. 특히 영남대로는 한양을 중심으로 X자 축으로 이루어진 조선시대 9대 간선도로 중 가장 대표되는 도로였습니다.
본 전시실에서는 조선 후기 전국도로 지도 및 18세기 영남대로 지역의 도로망을 자세히 나타낸 지도를 통해 영남대로의 역사를 이해하고, 조선시대의 영남대로가 경제적 이유뿐만 아니라 행정적으로도 큰 비중을 지녔던 까닭과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영남대로 현판 사진]
문경새재 입구에 세워진 문경새재상징문의 현판 영남대로의 원본으로, 우리나라 서예계의 대가인 경북 예천의 초정(艸丁) 권창륜 선생 글씨입니다.
Part 1. 영남대로의 역사

개국 초에 개성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한양을 중심으로 한 X자형 간선도로망이 이루어졌다. 조선조 이전에도 중부지방과 경상도 사이에는 교통량이 많았지만 대동맥이라 할 만한 도로가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 개국과 동시에 조정은 동래를 종착지로 정하고, 한양과 동래를 연결하는 간선도로의 노선을 확정했는데 이것이 영남대로이다.
영남대로가 통과한 지역은 조선시대에 가장 인구가 조밀하고 산물이 풍부하여 경제적으로 중시되던 곳이었다.
전국의 10대 도시의 반 이상이 분포했으며, 우수한 인재를 배출한 고장이 많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행정적으로 큰 비중을 두었다.
Part 2. 18세기 영남대로 지역의 도로망
조선시대의 주요 도로는 한양을 중심으로 종착지를 연결하는 방향에 따라 그 이름이 정해졌다. 영남대로 역시 말 그대로 한양에서 영남방향으로 향하는 큰길을 말하며, 조선시대 9대 간선도로 중의 가장 대표되는 도로였다.
960여 리에 달하는 길에 29개의 주요 지선이 이어져 있었고, 총연장이 약 380km로 한양에서 부산을 잇는 최단코스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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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기 영남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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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도로망
한국의 역과 원

한국의 역과 원
역(驛)은 중앙과 지방간의 왕명과 공문서를 전달하고, 물자를 운송하며, 사신의 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 및 숙박의 편의를 제공하는 것을 주로 담당하였습니다. 이와 달리 원(院)은 일반상인이나 여행자들의 숙식을 위해 설치된 시설로서 상업과 민간 교통의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장소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원제도와 그 기능에 대해 자세히 안내하고 있는 본 전시실에서는, 조선시대 간선도로가운데 제 4로와 5로가 경유하는 곳으로서 영남대로의 허브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던 유곡역과 문경의 여러 원에 관한 내용을 유곡도속역변천사와 함께 살펴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지역 출신의 조선후기 관료 임종수(1841~1893)와 관련된 소중한 문화유산으로서 구한말 당시의 사회·경제사를 살필 수 있는 유곡역 고문서를 함께 소개하고 있어 매우 뜻 깊은 전시공간입니다.
Part 1. 한국의 역과 원

영남대로상의 원·주막·역관의 분포
조선시대의 육상 교통기관으로 역이 설치되었다. 역은 중앙과 지방간의 왕명과 공문서를 전달하고 물자를 운송하며, 사신의 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 및 숙박의 편의를 제공하는 것을 주로 담당하였다. 또한 왕래인이나 범죄인을 검색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역은 삼국시대로부터 설치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시대에 이르러 초기의 6과 체제에서 중기 이후 22역도(驛道) 체제를 확립하여 제도적인 기틀이 마련되었다. 조선시대에는 41역도 524속역 체제의 전국적인 역로망이 확립되었다. 역도를 관장하는 찰방역을 중심으로 속역들을 두었다.
원은 역과 달리 일반 상인이나 여행자들의 숙식을 위해 설치된 시설로서 상업과 민간 교통의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장소였다. 조선후기에는 상업의 발달 등으로 역할이 쇠퇴하거나 혁파되었고 그 기능이 주막, 여점(旅店) 등으로 옮겨갔다.
지형이나 교통망에 따라 다르지만, 역은 30리마다 원은 10리마다 설치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Part 2. 문경의 역과 원

유곡역도 사적비
영남대로의 허브 - 유곡역
유곡역은 조선시대 간선도로 가운데 제4로와 5로가 경유하는 곳으로, 영남지역에서 서울을 잇는 주요 교통의 요충지였다.
문광공 홍귀달(洪貴達)은 일찍이 유곡역을 사람 목구멍에 비유하여 말한 적이 있다.모든 음식물이 넘어가는 목구멍에 병이 나면 음식을 통과시킬 수 없고, 음식이 통과하지 못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것처럼 유곡역은 그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했다.
유곡역에 딸린 속역은 18개였고, 이곳에는 종6품 찰방이 관장하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곽재우도 유곡찰방을 역임하였다.
Part 3. 유곡역 고문서
유곡역과 관련된 고문서이다. 문서와 관련된 인물인 임종수(1841-1893)는 이 지역출신으로 조선후기 관료에 입신하였다. 문서는 고종 16년(1879)부터 고종 27년(1890)의 교지 12점, 준호구(准戶口) 4점, 충훈부도사로 책정한 첩지 1점, 시권 1점, 유곡역 및 평릉역의 각종 문서 16권과 그외 충훈부 형조 관련문서 2점, 간찰 13점 등으로 다수의 문서들이 남아 있다. 이 문서들은 문경의 임성진씨 가문에서 일괄하여 소장하고 있으며, 구한말 당시의 사회ㆍ경제사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지방 유형문화재 제304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부상·지리지

보부상·지리지
옛길과 가장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무거운 짐을 지고 산 넘고 물 건너 이문을 좇아 팔도강산을 떠돌아 다니던 사람들이 바로 보부상입니다.
본 전시실에서는 보부상에게 특정업무를 맡긴다는 내용의 임명장인 차정문서와 함께 각 지역의 자연환경과 생활풍속이 속속들이 담겨 있어 마치 보부상들에게는 생활의 나침반과도 같았을 지리지(地理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결코 길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었던 보부상들의 삶의 흔적과 손때 묻어 세월의 향기 고스란히 묻어나는 옛 지리지들을 살펴보면서 팔도강산 이야기를 귀동냥하던 시절의 옛길로 여행을 떠나보세요!
Part 1. 길 위에서 떠날 수 없는 보부상

보부상은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을 총칭하는 명칭이며, '부보상(商褓商)'이라고도 한다. 전통사회에 시장을 중심으로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행상을 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교환경제가 이루어지도록 중간자 역할을 했던 전문적인 상인이다.
보상은 주로 기술적으로 발달된 정밀한 세공품이나 값이 비싼 사치품 등의 잡화를 취급한 데 반하여, 부상은 조잡하고 유치한 일용품 등 가내수공업품을 위주로 하였다. 또한 보상은 보자기에 싸서 들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판매하였고, 부상은 상품을 지게에 얹어 등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판매하였다. 이에 따라 보상을 '봇짐장수', 부상을 '등짐장수'라고도 하였다.
이들은 대개 하루에 왕복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를 표준삼아 형성되어 있는 시장망을 돌면서 각지의 물화(物貨)를 유통시켰다. 그러나 대부상ㆍ대보상들은 수운(水運)과 우마차로 다량의 상품을 일시에 운반, 판매하기도 하였다.
Part 2. 팔도강산의 모든 것 - 조선의 지리지

조선시대의 지리지는 전기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등과 같은 전국을 대상으로 한 지리지로부터 비롯된다.
후기에는 지방 단위의 지리지인 『읍지(邑誌)』가 편찬되었으며, 1,000여종에 달하는 많은 지리지가 남아있다. 지리지는 내용 또한 다양하고 풍부하다. 지역의 연혁을 비롯하여 산천(山川), 형승(形勝), 성곽(城郭), 진보(鎭堡), 진도(津渡), 역원(譯院), 학교(學校), 누정(樓亭), 고적(古跡), 인물(人物) 등을 포괄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리지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그 지역을 이해하는 지름길이 된다.
길과 스토리텔링

길과 스토리텔링
한양과 동래를 잇는 영남대로 위에서 각각 정반대의 방향으로 떠나 돌아오는 두 개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1617년 초가을, 지병을 치유하기 위해 동래온천으로 떠났던 당대의 대학자 한강(寒綱) 정구(鄭逑, 1543-1620)의 요양길과,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 철폐될 위기 앞에서 한양으로 떠났던 안동 유생들의 1717년 상소길을 생생한 그림 설명으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떠날 때는 슬픔과 걱정으로 떠났지만, 두 이야기 모두 기쁨과 여유를 찾아 돌아오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우리네 삶에서 길이 지니고 있는 희망의 속뜻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본 전시실에는 정구 선생 동래온천 요양기 목판본(1676)과 함께 벼슬아치가 공무로 지방에 나갈 때 역마를 징발하는 증표로 상서원에서 발행한 마패와, 전라도 장성의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의 송사(所志)에 대해 마패로서 직인을 대신한 암행어사의 판결 내용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Part 1. 조선중기 대학자 한강 정구 지병 치료 위해 동래 온천행
1617년 음력 7월 20일 초가을. 당대의 대학자 한강 정구가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동래 온천행에 나선다. 늙은 스승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 제자와 지역 관료 및 학자들의 배웅을 받으며 나왔다.
사빈 지암에서 배에 오른다.오전 내내 배를 대는 곳마다 사람들이 전송을 위해 모여 들었다. 6일간의 일정동안, 대구 도동서원에 분향하기도 하고, 남명 조식의 봉향한 신산서원 들르기도 했다.
이동은 주로 수로를 이용했고, 육로를 이동할 때는 말을 타거나 가마의 일종인 견여나 남여를 이용했다. 많은 제자들이 스승의 요양길에 동행했다. 한 달 동안 동래온천에 머물며 약과 온천욕을 통해 체계적인 치료를 하며 요양을 한다.
동래부사의 석별연을 끝으로 귀갓길에 오른다.귀갓길은 주로 육로를 이용했다. 경주에 들어서 경주부윤이 포석정에서 열어준 연회에 참석하기도 하고, 반월성, 계림, 첨성대, 봉황대를 방문하기도 한다.
요양의 효과 때문인지 열흘에 걸친 귀갓길에서는 고적을 탐방하고 연희를 즐기는 등 여유있는 여행길의 모습을 보인다. 귀가할 때까지 동행한 제자는 무려 30명이었다.
Part 2. 서원철폐 명령 반대 상소를 조정에 올리기 위한 '사빈서원' 유생들 한양 상경
1717년. 안동지방의 사빈서원이 철폐 위기에 놓이자, 이 서원의 유생들과 후손들은 서울로 올라가 궁궐 앞에 엎드려 상소문을 전달하기로 결정한다. 주변의 서원과 선비들이 여행 경비를 보탠다.
숙소에서는 상소문을 수정하고 대책을 의논하면서도, 하루에 100리 길을 걸어, 출발한지 8일 만에 서울에 도착한다. 그러나 상소문을 봉입하는 과정이 수월치 않아, 백방으로 도와줄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다섯 차례나 봉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도중에 양식과 여비도 떨어져 고향으로 지원을 위해 사람을 내려 보내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비변사로부터 "지방서원 철거에 조정이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비변사의 해석을 얻어냈다. 두 달여 만에 서원철거 명령 철회 소식을 안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조선선비들의 여행

조선선비들의 여행
선비들에게 있어 길을 따라 떠나는 여행은 인간과 삶의 본질을 탐구하고,치열한 자기 수련을 통해 우주와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고양된 정신 활동이었습니다. 따라서 선비들은 여행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특히 옛 선비들의 여행기에는 자연풍광과 역사, 문화에 대한 자세한 정보뿐만 아니라 그들의 인생과 철학, 예술 정신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옛 선비들이 남겨놓은 여행 기록들은 관광 정보와 홍보를 주목적으로 하는 오늘날의 보통 여행안내서와는 달리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느낀 자신들의 학문과 사상을 소개하는 철학서이자, 여행길에서 얻은 인생에 대한 통찰을 수준 높은 문장으로 표현해 놓은 예술작품으로서 그 시대의 사회와 풍속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귀중한 인문 유산인 것입니다.
문경 출신의 학자로 조선팔도 이름난 명승지를 둘러보고 그 일정과 여행길의 감흥을 낱낱이 기록해 놓은 옥소 권섭 선생의 유행록(流行錄)이 전시되어 있는 본 전시실에서는 조선시대 연경기행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열하일기』를 지은 연암 박지원 선생의 문집과 김종직 선생 문집, 홍여하 선생 문집 등 당시의 여행과 유람에 대한 내용을 담은 여러 기록을 비롯하여 개성 여행기록이 실려있는 유송도록(遊松都錄) 필사본을 함께 살펴볼 수 있어 길을 따라 떠났던 옛 선비들의 여행과 유람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Part 1. 조선선비들의 산수 기행
선비들은 산수를 유람할 때 동행도 많았고 가마꾼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방랑자 김시습(金時習)이나 가난한 선비들의 경우는 종자만 데리고 가기도 했다. 유몽인의 『두류산 유람록』을 보면 동행한 사람들은 각자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고 새끼로 동여매고 길을 갔다. 또『수친서(壽親書)』,『양로서(養老書)』와 같은 여행지침서를 참고하여 여행준비물을 갖추었다.
여행 준비물로는 종이ㆍ벼루ㆍ먹 등의 도구와 옷ㆍ이불ㆍ베개ㆍ방석 등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이미 그 지역을 여행한 사람이 작성한 유람록과 지도, 그리고 독서할 서적을 챙겼다. 비상음식도 챙겼는데, 대개 미숫가루와 꿀 등이었다. 정구(鄭逑)는 1579년 9월 10일 가야산 유람을 떠나면서 쌀 한 말, 술 한 통, 반찬 한 합, 과일 한 바구니와 책 몇 권을 꾸려 나섰다.
지방관이나 권세가 있는 사람들은 노새나 암말을 타고 갔으며, 산 밑에 이르러서는 젊은 승려들이 메는 담여에 올라 산허리까지 이르렀다. 숙소로는 사대부들의 경우 관현의 숙소를 이용하거나 촌민의 집을 빌렸지만 노숙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Part 2. 우주를 두루 관람하고 천하를 구경하노라, 아홉강을 건너고 다섯물을 넘노라
사마천의 『사기』, 史記列傳, 第五十七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중 천자들을 신선에 비유하여 천지를 자유롭게 노니는 모습을 묘사한 「대인부大人賦」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옛 사람들은 여행할 때, 고적을 탐문하고 전설을 채집하였으며 시를 짓고 산수를 품평하고 학문을 토론하는 것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삼았다. 또 일부 재지사족은 기생ㆍ악공ㆍ광대를 데리고 가서 흥을 돋우기도 하고, 사찰에서 광대놀이와 여러 기예를 감상하기도 하였다. 여행 후에는 여행 때 기록한 일기를 토대로 유록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그 유록을 기초로 직접 그림을 그리거나 화가에게 부탁하여 화첩을 엮기도 했다.
금강산은 선비들이 가장 여행하고 싶어하는 장소였으며, 조선시대 내내 많은 금강산 유록이 나왔다. 또 조선 후기에는 금강산 유람의 열기가 서민들에게도 확대되었고, 이를 한글로 기록한 산문도 여럿 나왔다.
Part 3. 조선 최고의 여행기 - 옥소 권섭의 유행록

옥소(玉昭) 권섭(權燮)의『유행록(遊行錄)』은 금강산, 설악산, 지리산, 가야산, 관동팔경, 영남, 영서, 호서, 호남, 관북, 해서, 기호 등 조선팔도 이름난 명승지를 둘러보고 낱낱이 그 기록을 남겨놓은 작품이다.
권섭 선생은 평소 유람하는 것을 운치 있는 일이라고 여겼고, 여행 중 즐거울 때면 언제나 일어나 다시 떠났으며, 그림 같은 주막과 샘물이 솟는 곳에서는 말을 세워 감상하면서 평생토록 여행길을 그만두지 않았다.
현재 필사본 3책의 『유행록』이 전하고 있다.
Part 4. 조선시대의 해외여행
국외로 나가 해외여행을 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조선시대 사람들이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마음 놓고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기회는 중국과 일본에 파견되는 연행사(燕行使)와 통신사(通信使)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연행사로 알려진 중국 사신단은, 조선 후기 청나라에 보낸 조선사신단의 총칭이다. 매년 한 차례씩 정기적으로 동지사(冬至使)가 파견되었고, 사행 목적에 따른 사은사(謝恩使), 주청사(奏請使), 진하사(進賀使)라 하여 부정기적으로도 파견되었다.
대부분의 사행은 사( 使) 2명과 서장관(書狀官) 1명을 포함해 30명이 원칙이었고, 수행원을 합치면 총인원 200명에서 300명 내외가 되었다. 세폐와 공물, 공사무역을 위한 물품, 식량과 사료 등 많은 짐을 휴대했다. 청대에는 육로만 이용했는데, 주요 지점은 평양ㆍ의주ㆍ압록강ㆍ봉황성ㆍ연산관ㆍ요동ㆍ심양ㆍ광녕ㆍ사하ㆍ산해관ㆍ통주ㆍ북경으로, 총 3,100리의 거리에 40여 일의 여정이었다. 실제로는 50~60일이 걸렸고, 북경 체류기일을 합치면 통상 5개월 내외가 소요되었다.
귀국 후에 서장관은 사행 중 보고들은 견문록을 작성해 국왕에게 보고했으며, 박지원의『열하일기』는 이런 연행록의 대표적인 저작이다.
조선은 일본과도 대등한 처지의 교린국으로서 상호간에 사절을 파견하였는데, 이때 조선 국왕이 일본 국왕(막부장군)에게 보내는 사절을 통신사, 막부장군이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사절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통신사란 용어는 신의(信義)를 통(通)하는 사절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조선시대 전기간에 걸쳐 총 20회가 이루어졌다. 통신사는 그들이 방문한 곳마다 서화ㆍ시문ㆍ글씨 등을 많이 남겼다. 그것들은 병풍ㆍ회권ㆍ판화 등의 형태고 만들어져 널리 유행되었으며,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통신사들도 국내로 돌아와 일본에서 겪은 견문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풍속화로 보는 길

풍속화로 보는 길
속담에 “백 번 듣는 것보다도 한번 보는 것이 낫다(百聞而不如一見)”라고 했습니다.
풍속화에 나타난 길 떠나는 사람들의 다양한 차림새를 커다란 그림으로 직접 확인해 보세요.

안능신영도(김홍도)
18세기 이후, 전통사회의 발전에 따른 사람과 세계에 대한 폭넓은 관심과 이해를 바탕으로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진솔하게 그려낸 풍속화에는 그림이 그려진 당시 사회를 바라보는 균형 잡힌 시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풍속화를 바라볼 때, 여느 그림들과는 달리 역사의 생명력과 문화 전통의 힘을 보다 강렬하게 느끼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사실성과 시대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연소답청(신윤복)
당대에도 사랑 받았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사랑 받는 조선후기 훌륭한 풍속화가들의 그림 속에서 길을 소재로 한 장면들을 선별하여 흥미롭게 꾸며 놓았습니다. 길을 따라 들려오는 옛사람들의 이야기 사이로 걸음걸음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반상도(김득신)
- 안능신영도(安陵新迎圖, 김홍도)
- 장터길(김홍도)
- 노중상봉(路中相逢, 김홍도)
- 연소답청(年少踏靑, 신윤복)
- 어물장수(신윤복)
- 반상도(班常圖, 김득신)
- 귀시도(歸市圖, 김득신)
본 전시실에는 오고 가는 옛길 위에서라면 흔히 만날 수 있었던, 마소에 짐을 싣거나 달구지에 연결시킬 수 있는 운반구인 ‘길마’를 비롯하여 짚신을 삼는데 쓰는 신골과 짚신, 그리고 말 등에 얹어 귀중한 문서나 엽전 등을 보관하던 가죽으로 만든 행낭 및 말 재갈 등이 같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백두대간에 서다

백두대간에 서다
대간(大幹)이란 큰 줄기를 뜻한다. 백두대간이란 백두산의 병사봉에서 시작하여 계곡이나 강을 건너지 않고 산줄기만으로 지리산 천왕봉까지 이어지는 큰 줄기를 말한다. 한반도의 등뼈이며, 우리 땅의 남과 북이 하나의 대간으로 이어져 비로소 삼천리 강산이 된다.
백두산을 뿌리로 하여 하나의 대간, 하나의 정간, 열 세 개의 정맥이 마치 나무줄기와 가지처럼펼쳐지는 것이다. 백두산은 우리 산의 시작점으로서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와 통한다. 백두대간은 그 길이가 약 1,400km에 달하며 고도는 100m에서 2,750m에 이른다. 백두대간이 완성된 하나의 개념으로 처음 알려진 것은 1769년(영조45), 조선 후기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 1712 ~ 1781)의『산경표(山經表)』에 의해서이다. 총 102쪽 분량의 책으로 마치 족보처럼 구성되어 있다.
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들은 우리나라의 열 개의 큰 강을 구획하는 울타리다. 이름 또한 이들 물길에서 따왔다. 이 땅의 모든 생활영역의 자연스러운 분계를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배산임수의 취락형성, 식생활과 주거양식의 구분, 언어권의 분포, 옛 보부상의 상권과 오일장의 권역 등이 산경의 산줄기로 쉽게 구분된다.
Part 1. 문경의 백두대간 (Beckdudagan of Mungyeong)
예로부터 문경은 충주와 더불어 인후지지(咽喉之地)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인후지지는 말 그대로 목구멍, 즉 들머리라는 뜻이다. 한강 유역으로 들어가자면 충주가 인후지지요, 낙동강 유역으로 들어가면 문경이 인후지지다. 그 나눔의 원천은 말 할 것도 없이 백두대간이다.
문경의 백두대간은 저수령에서부터 청화산에 이르기까지 도상거리가 110km에 이른다.
산경표에도 작성산, 대미산, 계립령, 조령, 이화현, 희양산, 주현, 대야산, 불일산, 화산 등 백두대간의 주요 지명 10여 개가 등장한다.

-
1대간
- 백두대간 (백두산 ~ 지리산)
-
1정간
- 장백정간 (원산 ~ 서수라곶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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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정맥
- 청북정맥 (낭림산 ~ 미곶산)
- 청남정맥 (낭림산 ~ 광량진)
- 해서정맥 (개연산 ~ 장산곶)
- 임진북예성남정맥 (개연산 ~ 풍덕치)
- 한북정맥 (추가령 ~ 장명산)
- 한남정맥 (칠장산 ~ 문수산)
- 한남금북정맥 (속리산 ~ 칠장산)
- 금북정맥 (칠장산 ~ 안흥진)
- 금남정맥 (조약봉 ~ 조룡산)
- 호남정맥 (조약봉 ~ 백운산)
- 금남호남정맥 (영취산 ~ 조약봉)
- 낙동정맥 (매봉산 ~ 몰운대)
- 낙남정맥 (지리산 ~ 분산)
길 테마 갤러리

길 테마 갤러리
다양한 길의 모습을 사진으로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는 테마 갤러리입니다.
[아름다운 길], [한국의 옛길], [우리가 걷는 길]
세가지 주제로 구분하고, 각 주제별로 스물 네 장씩, 모두 72장의 엄선된 사진들로 채워놓았습니다. 시간과 장소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진 속 길들의 여러 가지 풍경들은 오늘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길의 미래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Part 1. 아름다운 길
달콤한 향기 물씬 묻어나는 화사한 꽃터널길.
물길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지는 싱그러운 녹음길.
그리운 사람들과 함께 추억을 담아가는 단풍길.
동화 속 세상에서 희망을 꿈꾸는 새하얀 눈길.
아름다운 길을 따라 펼쳐지는 우리 강산의 파노라마!
자연과 길이 만나 빚어내는 사계절의 협주곡이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Part 2. 한국의 옛길
우리 조상들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옛길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소중한 공간입니다.
이미 사라졌거나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전국 방방곡곡의 옛길을 따라가면서 잊혀진 우리네 삶의 기억을 되짚어 봅니다.
Part 3. 우리가 걷는 길
네티즌과 방문객의 참여로 운영되는 열린 전시 공간으로, [길]을 소재로 한 자신의 사진을 직접 전시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 있습니다. 길을 사랑하는 여러분의 마음을 꾸밈없이 보여 주세요. 지금 바로 신청하세요!
※ 사진전시 신청문의 : 054-550-8368